그 팀에 가기까지

 내가 정식으로 입사한 첫 직장은 대학교 행정직이었다. 대부분의 행정직이 그렇듯 실적 압박 없이 짜여진 일을 물 흐르듯 잡음 없이 잘 굴러가게만 하면 되는 자리였다. 계약직이지만 과마다 있는 학사조교보다는 업무상 상위부서이기에 딱히 위계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슈퍼갑질 교수님들이 가끔 등장하는 것만 빼고.

 사무실에는 나를 제외하고 3~50대가 섞여 있었는데 정말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만 계셨다. 내 평생 그런 좋은 분들만 구성된 곳에서 또 일할 수 있을까. 처음 하는 직장생활이라 미숙한 점도 많았고, 꼼꼼하지 않은 내 성격상 잔실수도 종종 있었지만 모든 상사들은 나를 잠깐 일하다 갈 계약직 말단직원이 아닌 한 명의 동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흔히 미생이 상사만큼은 비현실적이란 평가를 하는데, 나는 실제 그런 상사들을 모셨다. 상사 때문에 골머리 썩고 스트레스 받는 친구들의 푸념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윗분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일년의 계약기간을 채웠고, 재계약을 내심 기대했지만, 교내 취업률 높이기 일환으로 1년마다 계약직이 금년 졸업생으로 물갈이되는 흐름에 쓸려 나가게 될 상황이 되었다. 계약직을 뽑을 땐 당해 졸업생을 우선으로 선발하라는 공문까지 내려온 상황. 그런데 업무를 마무리하던 즈음, 여차여차 업무 관계로 만난 다른 부서 팀장님이 나를 '착하고 성실한' 사람 잘못 보셨어요아이로 봐 주셨고, 그분의 추천을 받아 교내 프로젝트 팀에 지원하게 되었다. 


팀 특성 

이 사무실은 국비를 받아서 재학생 대상으로 교육하는 곳이었다. 부서장과 부장급의 직책은 교수들이 맡았고 그외 행정직원은 모두 1년 단위 계약직. 사업이 종료되는 시점까지는 계약 연장 가능. 하지만 부장급 교수들과 팀장급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이 프로젝트에 애착이 없었다. 내가 들어가고 2개월 후 팀 평가가 나오는데, 여기서 탈락하면 계약해지가 되면서 달콤한 시럽같은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에 계약직원들은 팀이 평가에서 탈락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 프로젝트가 이어지게 됐지만. 


한 해 예산이 국비로 약 3~40억이었는데 남겨도 이월되진 않기에 예산을 아낄 필요가 없는 구조. 말 그대로 물 쓰듯 돈을 펑펑 썼다.혈세따위 알게뭐람?몇 가지 기억나는 건...


1. 교수들 간단한 업무얘기 한답시고 회의비 명목으로 두당 1~2만원씩 올림. 물론 식사비로 지출한 금액이다. 무슨 이야기든 꾸미고 포장해서 회의록 만들어내는 건 아래사람 몫. 웬만한 직원들은 참석하지 않은 회의록쯤이야 거뜬히 만들어낸다. 회의록 내용은 소설을 써놔도 상관없고 회의록이 있다는 자체가 의미있기 때문이다.올림픽 정신회의록과 참석자 명단, 영수증 등은 지출증빙 자료로 보관한다. 다음 해 회계감사 때 모든 지출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

2. 진행하는 행사마다 현수막을 달고 인증샷을 찍어야 하는데, 현수막을 항상 맡기는 업체에 맡긴다. 그 업체는 단가를 후려쳐서 높게 받는 편인데 우리 사무실은 내 돈 아니니 알게뭐람 하는 분위기. 저렴하게는 만오천원에 될 현수막도 이 업체는 두 배 이상 받는다. 매년 반복되는 행사라 현수막 날짜랑 장소만 바꿔서 쓰기에 디자인 할 것이 없는데도. 30만원이 넘어가면 2개 업체 견적서를 받아서 더 저렴한 쪽이랑 계약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합리적 지출을 위한 제동장치다. 그러나 이 업체는 자체적으로 타 업체 견적서도 만들어준다. 100만원 이상이면 3개 업체 견적서를 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다 만들어준다. 기념품 제작 업체 등도 다 마찬가지.

3. 복사기가 두 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출력은 인쇄소에 맡긴다. 스테플러가 집어져 나오고 우리 시간 안 쓴다는 것이 이유.

4. 직원 전체가 연수회를 가장한 여행 명목으로 놀러간다. 2인 1실로 호텔 잡고, 쓰지도 않을 세미나실도 몇십 만 원 주고 대여한다. 연수회 현수막 들고 인증샷 남겨야 하기 때문. 맛있는거 진탕 먹고 술마시고 노래방 가고 호텔에서 자고 돌아와서 각종 영수증은 잘 꾸민 후 연수회 세미나 증빙자료로 제출.


리얼 이런 특급숙소를 2인 1실로 씀.


팀장과의 불화

 나 빼고는 전원 여자. 교회든 동아리든 여자들 틈에서 워낙 살아본지라 무리없이 적응할 줄 알았는데, 이제껏 겪은 곳과는 달랐다. 이제까진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기본 개념이 깔려 있는 곳에서 살아왔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을 동료로 만나게 된 상황. 착한 사람들도 있고 성격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문제는 두 명의 팀장이 내가 견디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둘 다 계약직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이번 사무실에서 팀장을 달게 된 케이스라 그 눌렸던 것들이 아래사람에게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특히 우리 팀 팀장 인격이 아~주 특출났다. 본인은 일 중심이라 했지만 자기 감정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이미 그 팀장이 사무실에서 왕따 시켜서 내보낸 직원이 있었고, 내가 일하던 중에도 팀장의 갈굼에 한 명 그만뒀다. 내가 업무능력이 뛰어난 직원이 아니란 것과 팀장의 그 특출난 인격은 시너지를 냈고 따라서 갈굼 보존의 법칙은 나를 향했다. 직장 내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학생들을 학기 중엔 설계 수업 물품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이고 방학 중에는 현장실습 보내는 것이었다. 설계비 신청은 학기 후반에 몰리고, 현장실습 업무는 방학 전에 준비해야 하니 5월 중반부터 방학 초까지는 격한 야근에 시달렸다. 도무지 혼자 처리할 수준의 업무량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심지어 전화도 하루 오십 통씩 받았고, 피크 땐 하루에 백 통까지 받아본 적도 있다.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려놓으면 한 통화 하는 사이 캐치콜이 너댓개씩 뜨기도 했다. 그나마 학생들에겐 전임자 버프착하고 친절한 직원으로 평가받은 듯했다. 책임감은 강한 편이라 열한시든 열두시든 새벽 두시가 되든 일은 되도록 해놓고 갔다.팀장은 내 야근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6월 입사한 신규 직원에게 학기 중 업무를 넘겨주고 방학 중 업무만 담당하게 됐지만, 7월 초에 있을 전년도 사업비 회계감사를 준비해야 했기에 업무량 체감은 오히려 늘어났다. 


회계감사 준비

 회계감사 일정은 상술한 연수회를 가장한 여행 직후로 잡혀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전임자가 준비해놓은 서류를 보니 개판이었다. 그 개판 서류 중 상당수는 다행히(?) 신입직원이 맡게 되어서 한숨 돌렸지만, 나랑 스파크 튀던 팀장은 내 서류도 곱게 넘기지 않았다. 전임자가 공금으로 사먹은 두유와 집에 갖고 간 락스 영수증은 학생지원비로 조작해 넣었다. 학생들이 실습 후 제출해야 하는 실습록이 있는데, 약 80개 정도가 없었다. 그걸 팀장은 나더라 만들어내라고. 20일치 실습록을 80개 만들라니, 난 못한다고 버텼고 팀장은 밤을 새서라도 완성하라고 심술을 부렸다. 결국 내가 꼬리를 내렸다. 팀장은 두눈 부릅뜨고 내가 괘씸해서 다른 직원들 동원도 안 해주겠다고 말했다. 회계감사 전날 밤은 샜지만 완성은 못했다. 이틀에 걸친 회계감사 중 내 파트는 둘째날로 배정되어 밤을 하루 더 새야 했다. 이틀 밤을 새며 만든 조작된 실습록은 다행인지 불행인지회계사가 들춰보지 않고 넘어갔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회계감사를 지나며 팀장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관계가 틀어졌다. 



퇴사를 마음먹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충분히 버텼다. 그만둘 생각을 하고 이전 사무실 계시던 분들과 얘기를 나눠봤으나 다들 조금 더 버텨보라는 조언을 하셨다. 그러리라 마음먹은 이튿날, 나에 대한 오해와 악의적인 왜곡이 섞인 충격적인 소문을 전해듣게 됐다. 발령 초반 서류 찾느라 캐비넷을 뒤적인 것과 기념품 예산 출처를 물어본 일은 사무실 뒷조사를 하는 내부고발자로 의심받는 근거가 되었다.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내 업무 도와주겠다며 학생보험서류를 갖고 가서 자기 방에 두고 퇴근해버린 말단교수에게 [죄송합니다만 연구실(행정직원 1명과 같은 방을 쓴다) 비밀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낮에 가져가신 서류에서 찾아볼 게 있습니다]란 문자를 보낸 것은 훗날 앞뒤 자르고 차포 뗀 채 '밤 늦은 시간 가정이 있는 여자 교수에게 개인 연구실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게 됐다. 당시 그 여자 교수는 나에게 문자를 아침에 봤다며 미안하다고 했는데 뒤로는 어떻게 얘길 한걸까?


 나를 추천한 분께 누가 될까봐 어떻게든 더 잘해보며 버티려 했으나, 이미 우리 부장교수가 저런 개소리를 그분께 얘기한 상황이었다. 내부고발자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이랜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여기서 계속 버텨봤자 나만 바보되기에 그냥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 판단하셨다. 나도 같은 생각. 그분께 죄송한 마음을 안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둔다는 걸 전해들은 부장교수는 날 부르더니 내부정보 수집해서 어디 신고하려는 거 아니었냐고 대놓고 물어봤다. 당연히 아니지. 나 인생 복잡하게 사는 거 안 좋아하고, 생각하는 정의를 실천하며 살고 있지도 않다.분풀이라면 몰라도. 혼자 망상 속에 벌벌 떨었을 그 인간 생각하니 참... 설사 그렇다 한들 맞다고 말하겠냐.



 옆 자리에서 가끔은 팀장 같이 까기도 하며 솔직한 얘기 들어주던 신입 직원은 알고보니 나랑 했던 이야기를 몽땅 팀장에게 전한 것 같다. 어떻게 알았냐면 팀장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나한테 직접 물어보는 타입이었거든.화끈하죠 그 직원, 학과조교 출신인데 업무상 나랑 부딪힌 적이 있었고 안좋은 소문도 좀 들었지만 성격이 안좋다거나 술먹고 학생이랑 싸웠다거나... 알고보니 괜찮은 사람... 이라는 내 평가는 앞뒤가 다른 기회주의자의 한 면만 보고 내린 오판이었다. 굴뚝에서 연기 나면 그럴 이유가 있는 법이구나 싶었다. 직급은 같지만 내가 몇 개월 선임이었으니 앞에선 웃었던 것이겠지.


정리와 인수인계

 그만두기로 확정된 후, 업무관계에 있던 몇몇 교수님들이 그동안 수고했고 잘 해줬는데 아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흔한 작별 인사지만 마음엔 위로가 되었다. 기업 출신 교수님 세 분은 기업에 몇십 년 있었으니 여초 사무실에서 남직원이 겪는 스트레스를 잘 안다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밥도 사 주셨다. 직장생활에서 처절한 실패(?)를 겪었다고 느끼던 중 교수님들과의 마지막 식사는 내가 사회생활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서 큰 위로가 됐다. 팀 차원에서는 송별회 그런 거 당연히 없었고, 있었다 한들 거절했을 것이다.그래서 안 해줬겠지


 기왕 나가기로 한 거, 퇴사일은 최대한 앞으로 당겨달라고 했다. 맘같아선 당일로 퇴사하고 싶지만 신입직원 채용 결재 선발 면접 인수인계 등 모든 절차 포함해서 가장 빠른 퇴사일을 선택했다. 인수인계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뒷말이나마 덜 나오게 해보자고 마음먹고, 내가 받은 인수인계와는 차원이 다른 고퀄리티로 준비했다. 업무절차는 세세한 설명과 나만의 노하우까지 넣었고 전산시스템 사용은 하나하나 캡쳐 뜬 후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이 고퀄은 내 기준이고, 내 자료를 후임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진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 빠뜨렸을 수도 있겠지만, 혼신을 다해 만든 건 맞다.

 약 5일 동안 인수인계를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후임은 인생선배로서 너무 착하게 살지 말라고 충고해줬다. 본인도 그렇게 살다가 많이 데였다며. 흠좀무. 드디어 퇴사일. 전날도 야근했고, 마지막 날인 당일 두 시간 일찍 출근해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팀장은 내 자료 중 몇백 명의 서류가 학과별로 나뉜 걸 학생 가나다 순으로 정리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이미 학과별로 나뉜 자료기에 찾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하지 않겠다고 개겼다. 마지막 날까지 숙여주기엔 너무 많이 쌓였다. 팀장은 아주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다가 나더러 그냥 사라지랜다. 예상치 못한 지시에 우물쭈물 하다가 거듭 소리를 지르길래 그냥 짐 챙겨 나갔다. 잘 됐지 뭐. 다른 직원이나 교수들과 인사도 못했다.마지막 인사는 접어두길 바래 오늘 단 하루만큼은영원히 안녕이다. 사요나라.


 나한테 밤 늦은 시간 문자를 받았던, 가정이 있는 여교수가 마지막 날 점심 먹자 그랬었는데 사정상 못먹게 됐다고 문자 보냈다. 아쉽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보자고 답이 왔다. 팀장이 여교수가 자기 딸한테 선물해준 장난감 받고는 '뭐 이런 촌스러운 걸 선물해주냐. 또 그 앞에 가서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해야겠네'라고 했던 걸 일러주려 한 건 아니었으나 나한테 왜그랬어요? 말해봐요? 정도는 묻고 싶었기에 좀 아쉽다.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퇴근길, 아니 퇴사길에 후배 집에 들러 내 업무 관련된 조교와 교수들에게 인사메일을 보내고 후임자한테 알려준 후 그 사무실과는 완전 작별...


안녕~~바이짜이찌엔


외전

인 줄 알았는데, 한 이주 뒤 착하고 나 많이 도와준 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후임이 13일 입사, 내가 14일 퇴사니 근무일이 13, 14일 이틀 간 겹쳐서 총무과에게 지적받은 거다. 웃긴 게 당시 이거 내가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팀장이 신경질 내면서 문제 없다고 그냥 그 날짜로 사직서 쓰라고 했었거든. 본론은 이틀 치 급여를 환수해야 하니 사무실 통장으로 그만큼 돈 넣으라고(...) 한달 뒤 초과근무수당 형식으로 돌려준단다. 괜히 꼬장부릴 필욘 없으니 오케이 했는데, 나중에 돌려주는 돈은 마지막 날 아침에 일 안하고 갔으니까 하루치 제외하고 주겠단다. 팀장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이겠지. 난 협조해주는 입장인데 전혀 응할 필요가 없는 조건이다. 배째라로 나오니까 바로 다시 이틀치 주겠다고(...) 그렇게 하고 이 사무실과 인연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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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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