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용서?

일상 2015. 3. 24. 21:13

 매우 좋지 않은 채로 끝나버린 이전 사무실 팀장과의 관계. 난 왜 그렇게 참고 참았던 걸까. 그러나 퇴사일, 그러니까 마지막 날엔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결국 참치마요를 먹고 만다. 학생 500명을 학과별로 정리한 자료를 학생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라는 팀장 지시를 이미 학과별로 나뉜 자료기에 찾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6층짜리 건물이 떠나갈 정도로 나가라고 소리지르는 팀장을 뒤로 한 채 유유히 떠났다. 어디가서 자기 만날 일 없을 것 같냐며 눈을 부라리는 팀장을 보며 속으로 '제발 안 봤으면...' 싶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보니 그 소원은 팀장에게 더 필요했다. 왜냐면...


 내가 발령받기 전인 2월에 전임자가 A, B학생에게 지급될 25만원을 누락시켰고 내가 발령받은 3월에 학생들이 찾아왔으나 예산은 2월까지 집행 가능해서 정상적인 지급은 불가능한 상태. 윗선에 보고하니 못준다 하란다. 결국 두 학생은 우리 팀 예산 지급하는 정부부처에 민원을 넣었다. 돈없다, 못준다, 배째라 하다가 민원 후 '지금은 곤란하니 나중에 챙겨주겠다'만 반복하던 윗선과 A,B학생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던 난 사비로 A,B에게 총 50만원을 송금했다. 학생들이 나중에 지급받으면 나한테 돌려주기로 약속했고. 7월 회계감사를 준비하며 내 전임자가 25만원 횡령한 것이 드러나 회수하고 그 돈을 A에게 지급, A가 나에게 송금하여 A는 상황 종료. 그리고 올해 2월에 장학금 명목으로 50만원을 B에게 지급, 바로 회수하고 나에게 25만원을 보내려 했으나(나머지 25만원은 어쩔랬는지 모르겠다) 전후사정 다 아는 B는 사무실에게 "너흰 1년 후에나 주면서 뭘 바로 돌려달란거냐"고 버티기 시전. 전화 온 팀장은 반말 찍찍 하며 내 탓으로 돌렸다. '왜 사비를 줘서 이 사단을 만드냐, 나가서까지 힘들게 하냐, 니 잘못이니까 기다리고 있으라'며. 하하. "나 이제 ㅇㅇㅇ씨 아래사람 아니니 반말하지 마시고, ㅇㅇㅇㅇ(그 팀 예산 지급하는 정부부처)에 민원 넣을테니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 잘잘못 따져봅시다" 


 이때부터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더니 일단 회의를 잡았단다. 몇 시간 뒤 그 팀 부장교수 한 명이 자기 사비로 25만원 주겠다네. 누가 돈 때문에 이러나? 교수 사비 받을 이유 없으니 안 받겠다고 했다. 막무가내로 내 이전 급여통장에 입금했지만 다시 돌려보냈다. 내 후임은 제발 자기 좀 살려달라고, 민원 넣으면 감사 나올거고 거기 죽어나는 건 실무자들이라고, 본인이 다 잘못했다며 사정사정을 했다. 난 팀장이 사과하면 넘어가겠단 뉘앙스로 답했고, 잘 해석했는지 다음 날 구구절절한 변명이 담긴 팀장의 문자가 왔다. 당신이 ~해서 ~했고 ~했다, 어쨌든 미안하다, 는 내용의. 그게 사과라면 조현아 쪽지는 석고대죄다. 예산 지급하는 부처에서 민원 양식을 다운받았다. 


 팀 한해 예산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감사를 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민원 내용을 구성했다. 전임자 횡령이 걸려 있고 장학금을 허투로 지급한 사실도 있다. 소스는 충분하다. 증빙? 내 후임에겐 미안하지만 그분과 한 카톡대화로 가능하다. 덧붙이거나 부풀릴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 얘기하면 된다. 내가 잘못한 거? 사비지급이 잘한 짓은 아니지만,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예산을 쓴 것도 아니니 꿀릴 거 없다. INTP(MBTI 유형)의 복수는 순수악을 연상케 한다던가. [보통은 '복수심' '앙갚음'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냥 신경을 끄죠. 하지만 '복수'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아요. 숨통이나 밥줄을 끊어 놔야죠. '복수'라고 마음을 먹으면 두고 보면서 상황과 계획을 정리하고 모아서 디데이를 정한 후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반박도 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마지막으로 내 동기를 톺아봤다. 표면적으론 내 잘못 아니란 거 입증하겠다는 이유를 댔지만, 솔직한 진짜 동기는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히 드러났다. 그 팀장, 나 퇴사 전에도 괴롭혀서 내보낸 직원이 둘이나 있었다. 사람 미워한 값, 결코 저렴할 수 없단 거 알려주고 싶었다. 민원 땜에 고생 좀 하겠지만 나한테 한 말과 행동을 생각하면 이건 약과다. 누구 미워한 건 그 댓가를 치르겠단 의미 아닌가. 자기 기분따라 아랫사람 힘들게 해도 별일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둘 순 없다. 그런 사람이 세상 편하게 살도록 둬선 안될 일이다. 그렇게 사람 힘들게 만든 인간은 본인도 당해봐야 할 것 같았다. 팀이 1년 사업 후 사업평가 받고 그 평가에 따라 다음 예산이 결정되는데 마침 3-4월이 평가기간이다. 감사 떠서 주옥(빠르게 읽으시오)돼보란 거다. 아, 내가 아랫사람한테 왜 기분대로 하고 살았을까, 하고 후회하도록.


정리하면 첫째로 내 잘못 아니라는 거 판정받겠다는 자존심이고, 둘째로 그동안 팀장에게 쌓인 감정에 대한 복수심이다. 동기를 정리(이거 내 전공이다)하며 적지 않은 시간동안 고민했다. 내 후임에겐 약간 미안한 맘이 있지만 공사를 구분할 때 민원 넣으면 안 될 외부적 요인은 없다. 그러나 발목을 잡는 건 역시나 내부적 요인이었다. 둘째 동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모를까, 복수적 동기를 인지하고 계획을 실행하기는 힘들었다. 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를 비롯해 용서에 관한 구절들이 떠올랐다. 며칠간 생각과 씨름했지만, 결국 멈추기로 결단했다. 용서할 때 풀려나는 자는 용서받은 자보다 용서한 자라던가. 민원을 강행했다간 후회하거나 내 가치관에 균열이 생길 것 같았다. 멈춰야만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사안에 대해 그 누구도 나를 설득하거나 요구해서 멈출도록 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오롯이 내 판단이자, 내면의 소리에 반응한 결과이다.


 나의 나름 치열한 고민과 관계없이 그 팀장은 '민원 넣는다더만 안넣었나? 별일 없네ㅋㅋ'하고 생각할 거다. 이게 가장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집중한 결과이니 후회하진 않을 것 같다. 근데 왜 이런 기록을 남기느냐? 변명하자면, 아마 마지막 응어리의 배출이 아닐까...ㅋㅋㅋㅋ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비 프로젝트팀 이야기  (0) 2014.12.24
맥도날드 알바의 추억  (1) 2014.12.23
글쓰기 학교를 지원하며  (0) 2014.09.15
Posted by 에소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