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총 님의 책 [욕쟁이 예수] 중 '양다리 예수' 를 정리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대화 속에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뜻' 이란 어휘가 사용된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뭘까"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그게 하나님 뜻인지 어떻게 알아?" ...


아래 사진,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여러 차례 본 기억이 있다.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만든 것일테다.

은혜되는 사진이다. 헌데, 두 가지가 걸린다.

◈ 딴지 1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 이해된다면 다행이지만, 나의 생각을 폐기처분한다는 식으로 이해될 우려가 있다. 그것은 일면 거룩해 보이나,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쳐도 과연 옳은가.

성경은 각 저자들의 문화적, 인종적, 성적, 교육적, 직업적, 기질적, 계급적 배경 등이 성령의 영감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마태'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고,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누가는 예수님을 '종'의 관점에서 보고 누가복음을 기록했으며, 복음서 내내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애착을 보인다)

바울은 로마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세'로 보고 순종하도록 권면했고,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음녀'로 표현한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피지배계급인 요한, 즉, 신분적, 계층적 차이가 작용한 것.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도 이와 같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 생각, 입장을 무시하고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덮어씌우는(overwrite)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교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과 어울리게 하시며, 우리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마주치게 하는 분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명 앞에 아브라함의 이의제기를 들으신 하나님,
니느웨와 박 넝쿨의 운명을 가지고  요나와 논쟁한 하나님.
이게 하나님이 우리와 일하시는 방식이다. 

우리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원하신다. (로봇을 원하지 않으신다!)
 

◈ 딴지 2
성경에서 '세상'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의 가치관' 이라는 의미에서의 세상,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즉,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서의 세상.

사진 속에서는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내려가 있다.
여기서의 '세상'이 첫 번째 의미라면 문제 없지만, 두 번째 의미로 생각될 경우 자신이 속한 시대와 지역과 이웃을 고려하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됐든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복음'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상황'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을 살아내는 예술이다.
행13:36 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되 자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다. NIV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겼다고 옮겼다.
자신의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대개가 공허한 종교적 레토릭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며 쓰여진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굉장히 훌륭한 책이나,
우리 시대를 통찰하려는 노력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나의 생각' 없는 하나님의 뜻은 없다. '세상의 소리' 없는 하나님의 뜻도 없다. 신앙이란,
1.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의지 사이의 긴장
2.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시대 사이의 긴장
을 풀어내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이다.
예수 믿는 자의 삶이란 긴장 속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만 '올인'하는 것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지표로 간주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이중적 긴장에서 발을 빼는 도피처로 악용된다.
우리의 본성은 긴장을 원치 않는다. 자연스레 한쪽으로 기우려고 한다. 

세상에 함몰되어 '세속주의'가 되거나,
세상을 철저히 배제한 '이원론'에 빠지거나.

이른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이원론을 선택한다. 답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마음도 편하다. 번민도 고민도 갈등도 없다. 교회에 헌신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에너지는 없다.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신성과 인성,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 전능함과 자기 제한, 십자가와 회피 사이에서 긴장을 경험했다. 그 덕분에 그분의 삶과 사역은 창조적이고 풍성했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없애고 싶어한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결론을 내려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심리적 안정감을 더 의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다. 마치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처럼.
"신앙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신적 소명이나 거룩한 사역도 때론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룩한 일조차도 왜곡된 신앙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뜻은, 두 겹 줄의 긴장과 불확실성의 고통이 촘촘히 박힌 것이기를 빌어 본다.

Posted by 에소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