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7.29

 만약 진주성동교회 수련회 당시 예배 실황 녹화를 했었고 내 찬양인도를 돌려볼 수 있다면 이미 나의 손발은 실종상태일 거다. 7년 반이 지났으니. 그렇다고 현재는 일취월장하여 '좀 하는' 인도자가 된 건 아니고, 타고난 게으름에 힘입어 최소한의 법칙으로 인도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그럭저럭 마친 첫 찬양인도 후,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신감을 제법 얻었다. 돌발상황에서 찬양인도자가 필요할 때 기꺼이 자원할 정도는 되었다. 가요를 '세상 초등 음악' 정도로 취급하고 mp3엔 어노인팅, 디사이플스, 예수전도단 등의 앨범만 가득 넣고 즐겨 들었다. 특히나 어노인팅 5집 예배를 인도했던 강명식 아저씨에 꽂혀 애드립 흉내도 내고 멘트도 종종 따라하고. '젊은 사람들도 지칠 때가 있죠?'

 다음 찬양인도 기회는 IVF에서 찾아왔다. 2006-1학기 담당자를 세우는 회의(챕터)에서 찬양담당, 문서담당 자리가 남았고 세워질 사람은 내 동기 친구와 나만 남은 상황. 나름 책 좀 읽는 척하며 문서 담당 자리에 관심을 보였던 터라 두 자리를 놓고 고민을 좀 했다. 동기 친구와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둘이 밖에서 작당을 하다가 결국 내가 찬양, 친구가 문서를 맡기로 했다. 들어와서 결과를 얘기하니 선배들이 길고 지루한 회의가 끝났기에!박수쳐 줬지만, 간사님은 다 모인 자리에서 너네 둘이 따로 결정하고 와서 통보하듯 결론내리는게 공동체적이냐고 일침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뾰로통해졌지만 지금은 백번 이해되는 간사님 마음.


 학기가 시작되고 악기 두 개, 그것도 뿅뿅 소리나고 중고로 십만원이면 살만한 건반과 엠프연결 안 되는 기타로만 큰모임 찬양을 했다. 당시 우리 캠퍼스 지부는 두 개였고, 기타도 두 개였지만 뿅뿅 소리나는, 중고로 십만원이면 살만한 건반은 하나 뿐이라 그마저도 없이 예배할 때도 있었다. 기타 넥과 줄의 간격이 0.5cm 정도 되는 파란기타로 매주 섬겨준 선배님께 감사를.

 2006년. 그때부터 난 고등부 서기를 맡으며 8년째 고등부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한창 기타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마침 고등부 찬양팀엔 기타가 없었다! 4월 경, 고등부 강도사님과 상의 후 고등부 찬양팀 기타 반주를 해도 좋다고 허락받았다. 당시 고등부에서 찬양인도 하던 학생은 현재 나와 오후 찬양예배 인도를 돌아가며 맡고 있는 동생이다. 여러모로 재능 있고 리더십도 뛰어난 아이라, 난 찬양팀 안에서 기타 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2006년을 보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엔 고등부 찬양팀 교사를 지원하고 담당하게 된다. 2007년 고등부 찬양인도를 했던 학생은 현재 청년부 찬양팀이며 성악을 전공하는 친구다. 착하고 순한 아이라 나랑 짝짜꿍하며 즐겁게 한 해를 보냈다. 연습 마치면 같이 순대 떡볶이나 족발 먹으러 다니고, 내일 찬양을 위해 발성 연습한답시고 오락실 노래방도 다녔다. 같이 놀아나는 덴 일가견이 있었지만 찬양팀 경험이 전무한, 근본(?) 없는 찬양팀 교사였기에 뭘 가르치거나 지도해주는 덴 애로사항이 많았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렀고, 2007년은 지나갔다.

 2008년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에피소드 하나. 2007년 여름 즈음에 나도 어느 찬양팀이든 소속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기도도 많이 했다. 지금이야 어째어째 팀장까지 2년째 맡고 있지만, 당시의 대청부 찬양팀은 내가 지원하기엔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팀 안에 팽배(해 보이는)한 끼리끼리 문화 속에 편입되지 못하리란 두렴이 있었던 듯하다. 9월 경,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동아리 방 근처에서 내가 재학중인 캠퍼스의 찬양팀을 모집한다는 홍보문을 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어 지원했고, 첫 섬김은 학교 근처 대형교회의 주일 저녁 헌신예배가 되었다. 당시 IVF 대표 형에게 이 같은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던 내 속내와는 다르게 짧지 않은 시간동안 혼났다. 아니, 혼났다기보다는 제법 대들었던 것 같다. '너 혼자 결정하면 공동체는 무슨 의미냐' '공동체가 저한테 그만한 소속감을 주지 못했잖아요'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만큼 풀리지 않는 얘기다. 현재는 바뀐 입장으로 내가 팀원들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고. 30분 가량 결론 없는 얘기를 하다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두어 번 섬겼는데 그 팀의 리더와 주류는 찬양 잘 하기로 소문난 Y모 선교단체였고, 다음 헌신예배 일정들이 주로 본교회 청년예배와 겹쳐 한번 두번 빠지며 서서히 안 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2008년 고등부 찬양팀 교사도 여차여차하여 결국 내가 연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찬양인도에 대해 도통 아는 것이 없어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내가 찬양인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보고자 했다. 언제나 그렇듯 파랑새는 집 안에 있는 법. 대청부 찬양팀장을 찾아가 상황설명을 하고 팀원이 된다. 당시는 찬양인도를 배워야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들어갔다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찬양팀에 앞서 말했던 2006년, 2007년 고등부 찬양인도를 했던 동생들이 나보다 한 주 일찍 들어가 있었기에 이제 찬양팀을 해도 아웃사이더는 안 되겠구나, 하고 안도하는 마음이 찬양팀 지원을 가능하게 했던 듯하다. 4주의 수습기간을 보내고 격주로 기타와 방송실을 역임하며 찬양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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