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네가 누군진 모른다. 다만 최소한 나랑 일면식은 있고, 나의 동역자이며, 아마도 이 글을 볼 것이란 것뿐.
지난 10월 28일, 학과 친구랑 같이 땅에서 지갑을 하나 주웠지. 우리학교 체대생의 지갑이었고 안에는 신분증과 카드, 현금 9만원 가량이 들어 있었어. 난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생각으로 그날 학교 자유게시판에 지갑 찾아가란 글을 썼고, 한참 연락이 오지 않아 11월 15일 한 번 더 글을 썼지. 그 글들은 자유게시판에 아직 남아 있어. 여전히 연락은 오지 않았고. 체육학과 사무실에 맡기면 알아서 찾아줬겠지만, 아마 선행을 한 사람으로서의 보상심리가 작용했던 것이겠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 듣고 싶다는 그런.
여튼 12월 2일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고, 오늘 오후 1시에 룸에 들렀다가 내 사물함에 둔 그 지갑에서 현금만 없어졌단 사실을 알게 됐어. 연락이 안 오니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향원이가 없어졌다고 말해줘서 알았던 거지. 그 순간 깜짝 놀랐어. 사물함에 그 지갑을 그냥 둔건 설마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우리 안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더구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너무 허탈하다' '지갑 주인에겐 뭐라고 하지' 등등. 그때 룸에서 내 잘못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에겐 정말 화가 났지. 신뢰저버림을 당한 나에게 그 말은 상처가 됐거든. 다시 수업을 가서 곰곰이 생각했지. 정말 내 잘못이었나.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다, 였어. 지갑을 빨리 찾아주지 않고 룸에 방치해 이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지도록 원인을 제공한 약간의 책임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으로 결론내릴 순 없지. 이건 분명한 범법 행위야. 낯 뜨거운 이야기다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해서 여성의 잘못이 아니듯 말이다. 나 때문이라는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잘잘못에 물 타기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지는 어차피 알 수 없으니, 왜 그랬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마도 그 지갑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라고 가정할게.
첫째로, 돈이 탐났겠지. 필요했다던가. 9만원이라면 학생에겐 제법 큰 돈 아니냐. 난 이제 용돈을 벌어 쓰는 입장이니, 그 액수다 더 크게 와 닿는다. 내가 무려 22시간동안 일을 해야 버는 돈이 90420원이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탐났었다. 눈 딱 감고 꿀꺽하면 22시간을 쉴 수 있다는 얘기니까.
둘째로, 네가 아는 사람이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의 돈이라는 것이 다소 남아있는 망설임을 제거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지 않았겠지만 혹 '에이, 어차피 잃어버린 건데' 란 생각을 하진 않았니? 단호히 말하겠다만 그 생각은 철저히 틀렸다. 나는 내 통장에서 이미 9만원을 출금해서 그 지갑에 넣었고, 내일 디피엠이 마친 후 주민등록증에 있는 주소로 간단한 편지와 함께 택배 보낼 예정이니까. 나는 내 결정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 없는 선택이라고 믿는다. 너에게 핑계거리를 주지 않기 위함이기도 해.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자체가 참 가슴 아픈 일이고, 공동체성에 큰 타격을 입히는 일이기도 하다. 피해자인 나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정신적 충격도 크고. 차라리 외부인이 침입해서 훔쳐갔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작년 여름이었나... 룸에 있던 푼돈을 모으는 돼지저금통을 도둑맞은 일도 있었지. 그땐 저금통이 룸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에 외부인의 소행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렸지만, 이번에도 그러기엔 지갑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었어. 의심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더욱 충격이 크다.
혹자는 그냥 묻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이런 일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공동체에 불신이 생기지 않냐고. 하지만 이미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제법 있고, 숨겨지지 않을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덮는 것은 너에게 장기적으로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칠 거고. 공동체에 덕이 안 된다는 이유로 곪는 상처를 숨기면 결국 도려내는 아픔을 겪지 않겠니. 어떻게든 사건을 덮으려는 삼일교회를 떠올리니 더더욱 침묵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잘못을 꾸짖지 않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은 심심찮게 접하는 거잖아.
이번 일로 네가 큰 부담을 가졌으면 좋겠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만큼 큰 사건으로 남기를 바란다. 나에게 다가와 고백해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또 없겠지. 둘만 아는 비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함은 물론이고.
밤이 늦었구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편지를 읽은 우리 공동체원 역시 함께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이 사건으로 인해 끊임없는 부담감으로 너에게 복 주시기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다른 사건에 대한 예방접종으로 선용해 주시기를...
20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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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활동한 동아리의 싸이월드 클럽에 2010년 12월에 썼던 글이다. 5년이 넘게 흘러 잊고 있었는데... 엊그제 당사자가 용기를 내서 자기가 한 것이라 고백했다.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했을까. 5년이란 세월동안 맘을 파고드는 가시가 되어 제발 가라고 아주 가라고 애써도 계속해서 그 아이를 괴롭혔을 테다.
이익보다 신념과 양심을 강조하며 살아온 내 삶의 방식에 의문이 들어가는 타이밍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해 주시는구나. 5년 전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었고, 수확의 기쁨을 맛보았다. 감사한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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