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칼럼 [마지막 집세]를 읽고
이른 봄철의 날씨가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한다던가. 다가오던 봄이 주춤하던 무렵, 그 날씨보다 마음을 싸늘하게 만든 뉴스가 있었다. 세 모녀가 자신들이 세 들어 살던 방의 주인에게 월세와 죄송하단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번개탄을 피웠단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글쓴이는 PD로서 일과 관련해 낯선 이들의 주목받지 못한 죽음과 유서를 접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글쓴이에게 세 모녀의 죽음은 일반인들이 뉴스로 접하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와 닿았을 것이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짧은 유서로 추측할 수 있는 죽음 전의 상황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자연히 숙연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며칠 전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에 일부 주민들이 집값 하락을 걱정하더라는 뉴스를 보고는... 정말이지 왜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는지 몸소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집 주인과 세 모녀의 관계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죄송하다는 말이 반복되는 걸로 봐서 모질지 못한 집주인이었을 테고, 그 인간적인 마음에 어떻게든 그 마음의 부담을 덜고 싶었던 세입자였을 것이다. 집주인은 혹여나 집세의 부담이 그 가냘픈 목숨줄에 닿였을까 하여 며칠을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여기서 글쓴이는 애도를 표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간 문제제기를 한다. 복지의 사각지대 또는 맹점, 다시 말해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세상의 저편으로 떠나가는 사람들 외에, 가해자가 명백하다고 할 정도인 사건들과 그 가해자들의 인간이길 포기한 행동들을 짚어낸다. 사람다운 사람들은 스러져가고 상처받는데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은 배불러 가고 그 배를 북삼아 두들기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세상인 것인가? 하고.
99% 이상의 사람들이 공감할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불법’의 딱지를 받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펼쳐질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람’인 저자는 초점을 법이 아닌 사람에게로 맞춘다. 마치 샤일록 같은 네 사정이야 어쨌든 내 돈은 내놓으라는 탐욕스런 이들의 세상이 펼쳐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 모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인간적인 마음을, 단체행동권을 행사하는 사람에게도 베풀어 달라는 것 같다. 글쓴이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약간은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이익을 보장하는 세상인 것 같다. 그것은 자연히 더 큰 이익을 추구하면 비인간적인 것이 용납되어지는 세상으로 연결된다. 대안은 모르겠다. 그저 내 마음을 정비한다. 나를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이 인간됨 영역의 장벽을 두드릴 날이 곧 다가올 텐데 얼마나 버티고 견딜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