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부? 청년부?

공동체 2015. 6. 30. 11:41


2012년 총회를 하며 대학청년부의 명칭을 청년부로 변경했다. 

기존의 대학부/청년부 명칭은 청년 1부, 청년 2부로 바뀌었고.


이 명칭 변경 안은 내가 6월 경에 처음 제시했던 것이다. 월례회 때 나름 교육학도의 관점에서 근거를 가지고 던진 안건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대학진학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오며 08년 최고치인 83.8%를 기록했지만 그 후로 대학진학률은 점점 떨어지며 2011년에는 72.5%로 나타났다. 대학부라는 이름은 적어도 1/4의 구성원들과 관련 없는 명칭인 것이다. 


2. 현재 대학부/청년부의 구분은 나이로 이뤄진다. 남 27세, 여 25세부터 청년부가 된다. 예전엔 2년제든 4년제든 졸업만 하면 청년부로 옮기던 때가 있었는데 전문대를 졸업한 22살 자매가 30대 언니오빠들과 같이 소그룹을 하게 되는 어정쩡한 상황이 발생하여 나이로 부서를 가르게 되었다. 여기서 대학부라는 명칭이 다시 한번 지적을 받게 된다.(추후 남녀 구분없이 26세부터 청년 2부가 되도록 회칙 변경)


3. 대학부라는 명칭은 대학 물 좀 드신 분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학력이 권력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취업이나 재수 예정인 고등부 아이들 중엔 "대학부를 내가 왜 가?" 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자가 상대적 우월성을 누리고자 하는 경향은 어쩔 수 없더라도 교회가 그래선 안 되잖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근거를 가지고 제시한 안건이었으나 총회에서는 단순히 명칭 변경을 한다는 것만 얘기하고 어떤 맥락에서 나온 안건인지 부가적인 설명 없이 상정되었다.이씨 근데 의외로 2/3 이상의 동의를 받아 무난하게 통과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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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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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총회

공동체 2015. 6. 30. 11:30

11월은 공천위원회가 열리고 공천자를 선출한다.

두어 달 전부터 회장 공천 받을거라 예상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가.







회장 공천자는 나를 포함하여 두 명이란다.

"님 공천염. ㅊㅋㅊㅋ""

"헐. 나머지는 누군데?"

"안알랴줌"







고민해볼 것도 없다. 

나머지 한 명은 지금 진장인 누나다.



대놓고 찾아가서 의중을 물어봤다.

입장은 나랑 같더만. 


"되면 하고, 안되면 안하고. 근데 안되면 좋겠고ㅋ"


공천 올라오는 사람의 의견표명 빈도는 대략 이렇다.


1. 나를 뽑아주시오 - 5%

2. 뽑히면 열심히 해보겠다 - 25%

3. 나도 모르겠다. 결과에 따르겠다 - 40%

4. 저 못하겠음. 뽑지마셈 - 30%


누나와 나 둘 다 2와 3 사이의 입장.



총회 전날부터 무슨 말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

이제껏 경험하기로 총회 득표는 크게 두 가지 변수로 결정된다.


1. 평소 공동체에서의 이미지

2. 공약(소감?) 이야기


따라서 그 자리에서 되는대로 내뱉고 들어올 수는 없당.

대략적으로 큰 그림은 그리고 올라갔는데

가장 중요한 공약부분을 죽 쑤고 내려왔다. Aㅏ...

역시 난 말은 안 돼. -_-;



뭐라고 지껄이고 왔는지 상기해보자.



5년만에 공천받아서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많이 엇나가고 있었는데

이제 정신 좀 차렸다는 의미로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천 받고 2주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아시는 분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 텐데

저는 일단 체제에 비판적이고(ㅋㅋ)

공동체의 화합보다는 분열에 관심이 있고

막 다들 으쌰으쌰 할때 태클거는 것이 취미고

여하튼 그런 인간입니다.



이정도까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됐었다.



이런 제가 공동체 대표라는 자리에 어울리는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공천을 받고는 어떻게 말하면 떨어질까, 궁리도 해보고 그랬는데

저의 모습과 성향이 어떠하든지간에 결론적으로

판단은 공동체에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회장이, 만~약의 경우에 회장이 된다면

어떤 그림을 가지고 한 해를 보낼 것인지를 말씀드리고

결정은 여기 계신 분들께 맡기려 합니다.


횡설수설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여기까지도 큰 무리 없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의 공약이 뭐냐.


일단 제가 회장이, 만~약에 회장이 된다면 공동체 예산을 2/3로 줄이겠습니다.

교회가 대외적으로 돈 많이 쓰는 이미지라는거 안좋은거 같아요 <= 뭔소리야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행사를 축소시킬 거구요.

그리고 공동체의 지적 능력 향상을 위하여서 <-레알 교만해보임

수련회든 평소 예배든 초청 형식의 강의를 늘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 (무슨 말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음)


진짜 끝판 가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는 어딘지 또 난 누군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뒤에 올라온 후보는 소감 발표의 시작을

"앞의 후보 말하는 것 보니 잘할 것 같군요 호호" 

라고 했지만

개표 결과는 약 40:25 정도로 내가 낙선.

회장이 한방에 당선되려면 2/3 이상의 득표를 해야하고,

3차 투표에서는 다득표자가 당선된다는 조항이 있지만

양자대결에서는 그닥 의미없는 조항. 확인사살 두번 더 한 후 낙선 확정.


총무로 또 추천받아 올라갔으나 안한다는 말을 돌려서 했고

내가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건 알았지만

자칫 당선될 뻔한 22표를 획득 후 낙선. 휴휴.


이제 맘놓고 구경만 하면 되겠지 ㅋ_ㅋ

했는데, 회계로 또 올라감. 하...

나 갖고 장난치는 느낌 나서 심히 기분이 상했으나

추후 날 추천한 당사자와 대화 후 추천이유에 대해 납득함.

이번에도 당선될 뻔한 21표를 획득. 당선자는 23표.



이 고정된 22여표로 인해 

총회가 끝나고는 내가 사람 샀다느니 매수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ㅋㅋㅋㅋ

대체 왜뽑는거야 -_-; 이런 체제에 비판적인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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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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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균형]

펌글 2015. 6. 30. 11:27

대박만화당.

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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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공동체 2015. 6. 30. 11:25

오랜만에 고등부, 청년부 찬양 인도가 겹쳤다.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다던가. 

대부분의 인도자는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찬양인도를 하면 소진이 많은 편이다. 


예배를 마친 후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저녁 먹고 교회에서 레크레이션 하며 노는 일정.

청년부 조장들과 신입생들은 식사 후 레크레이션을 하러 갔고

난 청년부실에 남아 시찬을 펴고 피아노를 깔짝이고 있었다.

내 피아노 연주력은 코드만 겨우 잡는 수준이지만

혼자 찬양하는데 번번이 틀린다고 누가 뭐라 할소냐.





그런데 예배 마치고 교회에서 방황하던 스물한살 예대생이 들어온다.

가끔 같이 찬양하는,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되게 잘 하는 여자아이다.

순순히 피아노를 내어줌으로서 유혈사태를 피하고 같이 찬양을 시작.


원래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란 건 알았지만

완벽한 시창이 되는 걸 보고 정말 놀랐다.

다리놓는사람들 예배인도자컨퍼런스 2005앨범에서 (아마도 강동균 인도의) 전능하신 주.

이 찬양을 악보만 보고 원래 알던 노래처럼 부르고 애드립과 화음도 넣고

피아노도 온갖 화려한 꾸밈음을 넣어서 치는데 와.... 입이 떡 벌어졌다.


싱크로율 98%



시찬 9집을 뒤적이며 알만한 곡들은 막 불러제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음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지.


찬양집에 더 이상 부를만한 노래가 없을 즈음,

청년부실 앞에 걸린 올해의 표어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를 보더니

이 아이는 작사작곡을 해버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단 한 가지

내 삶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는 것

내 평생에 주님만을 노래하는 것

어떤 상황이나 순간에도

내 삶에 찾아오신 주님을 노래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부르길래

난 원래 있는 노랜 줄 알았다. -_-;

그 아이는 별로 어려운 건 아니라며
나도 해보라며 D코드 진행을 쳐주었다.

음... 음... 우물쭈물... 에라 모르겠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오직 공의가 물 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 되게 하소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받는 자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선포하소서


어설픈 멜로디로 간단한 곡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물론 그 멜로디가 희미하다.
가사는 참... 나스럽군.


앞에 놓인 콜라를 보고 또 노래를 만들어낸다



콜라~ 오 콜라~ 넌 너무 매력적이야

톡 쏘는 그맛 세상에서 하나뿐이야

사이다? 넌 사이다와 급이 달라!

오오오 콜라 없인 못 살아 콜라 넌 너무 매력적이야


한 1분짜리 노래로 작사작곡 했는데 세세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신나고 코믹한 노래였다.ㅋ 문득 떠올라서 물어봤다.


"악동뮤지션 애들도 이런 식으로 노래 만드는 거야?"

"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다리꼬지마 같은 노래도 이렇게 만들었을걸요."

"오와... 그럼 너도 작사작곡 간단하게 막 하고 그러겠네?"

"넹. 꺄르륵ㅋㅋ"

사실을 얘기하고도 좀 부끄러웠던지 웃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누었는데

사람은 음악을 듣지 않으면 감정이 메마른단다.

박성업류의 황당무개한 주장도 연관이 있겠다 생각하며 들었는데

우울한 노래를 듣는 사람은 우울해지고,

신나는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은 들떠 있고,

음악을 안 듣는 사람은 감성이 죽는단다.


우울한 사람이 우울한 노래를 즐겨듣는게 아닐까, 했는데

이내 닭과 달걀같은 문제라 생각되었다.

시초야 어쨌든 닭이 있으니 달걀이 있고, 달걀이 있으니 닭이 태어나듯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려니.


그러다 뇌리를 스친 것이

내가 음악(가요든 ccm이든)을 즐겨들은 지 꽤 오래 됐다는 것과

그리고 요즘 들어 감정이 메말라간다는 것을 느꼈다는 거.

음악의 부재가 그 원인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굳이 의식적으로 찬양 앨범들을 들어보려고.




그렇게 우리의 찬양과 대화는 오후 5시즘 시작해서 7시 반까지 달렸다.



20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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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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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 수업 레포트였다.



바보 만들기(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저자
존 테일러 캐토 지음
출판사
민들레(도) | 2005-07-0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근대교육의 조종을 울리는 책이자, 교육의 오래된 미래를 여는 책...
가격비교



국가 독점 교육제도가 학생들의 눈을 이처럼 어둡게 만드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교육 기회의 균등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 공교육 강화가 필요하단 이야기만 접했고, 그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자는 철저한 갈등론자이고 우리 상황에서도 이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직접적인 비교 과정이 있어야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교육을 포함한 미국의 제도들을 받아들여 많은 부분이 비슷하니 아주 엇나가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약간 의외였던 점은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교육제도를 경험한 이민자들이 한국의 치열한 교육열에 아이를 맡기기 싫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는데, 결국 미국의 교육도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문맹(쉬운 한글 덕분이기도 하지만)이나 산수를 못하는 학생은 없으니, 차라리 지식을 쌓는 면에선 우리나라가 미국보다는 나은 수준인 듯한데 바보 공장이 가동되는 현실은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본 책에서 내 세계관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다 준 명언이 있었는데, [모든 조직의 숨겨진 첫 번째 목표는 자체의 생존과 확장]이라는 한 마디였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교회 문화도 이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이 법칙에 지배받고 있다. 성경을 절대 권위에 두고 결코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축자영감이란 이론을 내세워 교조주의적으로 성도들을 ‘교육’한다. 그러니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당연히 가르치는 교리 잘 받아먹고 시키는 일 열심히 하는 사람 좋아하지 성경 연구하며 스스로 의미를 찾거나 스스로 만족할 목적을 찾아내는 성도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은 어릴수록 더 강하다. 세뇌되는 시기가 빠를수록 비판적 사고를 가진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앞으로 교회교육의 한 축을 담당할 내 진로를 생각해보면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평생의 숙제이다.

 

 거대한 체제가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건 모르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도 키팅 선생의 실패(물론 마지막 장면으로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도 학교를 개선하겠다고 조물락거려 봐야 소용없다, 바닥에서부터 교육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체제의 전복을 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체제 속에서 ‘올해의 교사’ 상을 수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 교사가 어떠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상을 받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실제적으로 교육 현장은 학교보다 교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진정한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학생들은 틀에 박혀 일방적인 지식을 전달받는 객체로서의 역할을 벗어나, 저자가 말하는 의미를 추구하고 능동적으로 건전한 인격체를 만들어가며 비판할 줄 알고 토론하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이해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국가 독점 교육제도 안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여기서 이 시도를 한국 교육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첫째로 학생들 중에서도 일부는 총체적 교육을 받기보다 학교라는 기계의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받기를 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보가 되어가는 아이들을 구출하자는 희망에 찬 구호가 그런 학생들 앞에선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설령 학생이 동의한다 가정해도, 구조화된 교육체계의 도움으로 고지를 점령하기 유리한 가정에서는 학부모들이 그런 변화를 가만 두고 볼 리 없다. 그렇게 재생산된 ‘기계의 부품’은 자신들의 자식 세대가 교육을 받는 시기에 자신의 부모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고, 자녀들의 자녀까지 끊임없이 답습해 나가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자는 저자의 입장에 적극 동의하고 내 자식도 가능하다면 홈스쿨링을 하고 싶지만, 양육에 최소한의 에너지도 쏟지 않는 부모들이 있기 마련이고 의무교육이 사라진다면 그런 가정의 아이들은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양극화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교육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작되지 않은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하는데, 실제 그렇게 규제가 풀릴 경우 제도권의 주입식 교육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교육기회의 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교육을 통해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교육 분야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세계관이 확 트임을 경험했다. 불의한 교육제도를 다 뜯어 고쳐버리고 싶은 열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오며 현실의 벽은 높고 내가 이 불의한 세계를 타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음을 느꼈다. 긍정적 변화를 이루어간다면 이전의 악습을 떨치고 필연적으로 더 좋은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순진한 발상이다. 변화는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고 그 시도가 불러오는 갈등으로 인해 오히려 그 전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정적인 변화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듯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겠지. 최소한 먼저 학교에서 배우는 게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며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붕어빵 틀에 찍혀 나오듯 ‘바보’의 일괄적 생산은 침체되지 않을까? 장래의 특정 이득을 위해 전인격성을 포기시키는 학교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최소한의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나의 진로가 공교육 속의 교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체계화된 교육체계(교회교육) 속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작은 역할은 맡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의 나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체제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제 속에 있지만 전인적인 교육을 펼치며 학생 각자를 존귀하고 영향력 있는 존재로 성장시키고 싶다. 내가 키워낸 제자들이 훗날 인격적 교육을 해준 선생님이 있었다는 추억을 되새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 세상의 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제법 값지게 살았다는 평가는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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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 렙돈

생각 2015. 6. 30. 11:17
 
  1.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2.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3.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성전에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다(42).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한다(43).


많이 접하는 본문이다. 보잘 것 없는 과부의 헌금을 넉넉히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나오는 설교도 많다. 이런 류의 설교는 흔히 드릴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금액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그런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우리의 것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과연 이 본문은 그러한 의도로 쓰여졌을까?



성경사전에서 렙돈의 정의를 찾아봤다. 

렙돈 : 그리스의 최소 동전 단위. 호리로 불리기도 한다(눅 12:59). 중량 1.7g, 앗사리온의 8분의 1, 고드란트의 2분의 1에 해당된다(막 12:24). 예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칭찬하셨다(눅 21:1-4).


지금으로 치면 오백원짜리 두개를 넣었다고 보면 적절하겠다. 동전을 넣는 순간 헌금함 바닥에 짤랑 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고, 주위의 시선을 끌기도 했을 것이다.



41-44절만 본다면 예수님이 과부를 칭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해당 구절의 앞뒤를 살펴보자.

36-40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을 질책한다. 몇 가지 근거를 드는데, 그 중 하나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이다.


13:1-2에서는 성전을 나가시며 성전의 화려함에 심취한 제자들에게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성전이 화려하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는가? 과부를 착취하는 서기관을 비판(38)하다가 헌금하는 과부를 주목했으며(43-44), 서기관이 있고 과부가 헌금을 낸 그 장소가 무너질 것이라 얘기한다(13:2).


많이들 오해하는데, 사실 예수님은 과부를 칭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많은 헌금을 냈다고 했을 뿐이다. 앞뒤 문맥이 없다면 칭찬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과부를 착취하면서 기도는 근엄하게 하는' 서기관을 질책(38v)한 후 한 이야기라면 의미는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히 서기관 질책의 연장이 된다. 이 과부는 그 질책의 명확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저것 봐라. 저들은 생계가 곤란한 과부의 생활비마저 받아가고 있다'


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헌금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단, 이 본문은 그런 맥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부의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받아내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질책이었고, 그 불의가 이뤄지는 성전에 대한 사망 선고였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1장도 앞뒤 문맥이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서기관 질책 - 과부 언급 - 성전 무너짐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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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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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총 님의 책 [욕쟁이 예수] 중 '양다리 예수' 를 정리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대화 속에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뜻' 이란 어휘가 사용된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뭘까"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그게 하나님 뜻인지 어떻게 알아?" ...


아래 사진,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여러 차례 본 기억이 있다.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만든 것일테다.

은혜되는 사진이다. 헌데, 두 가지가 걸린다.

◈ 딴지 1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 이해된다면 다행이지만, 나의 생각을 폐기처분한다는 식으로 이해될 우려가 있다. 그것은 일면 거룩해 보이나,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쳐도 과연 옳은가.

성경은 각 저자들의 문화적, 인종적, 성적, 교육적, 직업적, 기질적, 계급적 배경 등이 성령의 영감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마태'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고,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누가는 예수님을 '종'의 관점에서 보고 누가복음을 기록했으며, 복음서 내내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애착을 보인다)

바울은 로마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세'로 보고 순종하도록 권면했고,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음녀'로 표현한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피지배계급인 요한, 즉, 신분적, 계층적 차이가 작용한 것.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도 이와 같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 생각, 입장을 무시하고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덮어씌우는(overwrite)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교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과 어울리게 하시며, 우리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마주치게 하는 분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명 앞에 아브라함의 이의제기를 들으신 하나님,
니느웨와 박 넝쿨의 운명을 가지고  요나와 논쟁한 하나님.
이게 하나님이 우리와 일하시는 방식이다. 

우리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원하신다. (로봇을 원하지 않으신다!)
 

◈ 딴지 2
성경에서 '세상'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의 가치관' 이라는 의미에서의 세상,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즉,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서의 세상.

사진 속에서는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내려가 있다.
여기서의 '세상'이 첫 번째 의미라면 문제 없지만, 두 번째 의미로 생각될 경우 자신이 속한 시대와 지역과 이웃을 고려하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됐든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복음'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상황'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을 살아내는 예술이다.
행13:36 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되 자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다. NIV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겼다고 옮겼다.
자신의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대개가 공허한 종교적 레토릭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며 쓰여진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굉장히 훌륭한 책이나,
우리 시대를 통찰하려는 노력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나의 생각' 없는 하나님의 뜻은 없다. '세상의 소리' 없는 하나님의 뜻도 없다. 신앙이란,
1.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의지 사이의 긴장
2.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시대 사이의 긴장
을 풀어내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이다.
예수 믿는 자의 삶이란 긴장 속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만 '올인'하는 것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지표로 간주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이중적 긴장에서 발을 빼는 도피처로 악용된다.
우리의 본성은 긴장을 원치 않는다. 자연스레 한쪽으로 기우려고 한다. 

세상에 함몰되어 '세속주의'가 되거나,
세상을 철저히 배제한 '이원론'에 빠지거나.

이른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이원론을 선택한다. 답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마음도 편하다. 번민도 고민도 갈등도 없다. 교회에 헌신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에너지는 없다.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신성과 인성,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 전능함과 자기 제한, 십자가와 회피 사이에서 긴장을 경험했다. 그 덕분에 그분의 삶과 사역은 창조적이고 풍성했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없애고 싶어한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결론을 내려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심리적 안정감을 더 의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다. 마치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처럼.
"신앙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신적 소명이나 거룩한 사역도 때론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룩한 일조차도 왜곡된 신앙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뜻은, 두 겹 줄의 긴장과 불확실성의 고통이 촘촘히 박힌 것이기를 빌어 본다.

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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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입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자'란 단어에 대한 단어가 극히 부정적이다.
현상수배지에 '노동자풍' 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

그 예로, 한 어머니가 청소부 아줌마를 보고 아이에게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노동자 된다" 라고 말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대부분 어려서부터 많이 듣던 말이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많이 해본 말이다.
인권의식이 발달된 선진국이라면 이런 말은 형사처벌 대상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감정노동자, 서비스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는 사회라는 것.

외국에선 [파업에서 꼭 승리하세요!] 라는 메시지가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 [뉴욕 남자 파리 여자]에서 딸과 엄마의 대화.
"엄마, 집에 오는데 파업 때문에 길이 막혀 난리가 났어요"
"여긴 미국이 아냐!"
노동자가 파업한다고 불평하는건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자본주의, 미국에서나 하는 얘기.

주한 프랑스 대사관 다니엘 르 가르가송의 인터뷰 中,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여론이 파업에 대해 이해심을 보이는 편입니다. 파업권이 필수적인 사회 권리라는 신념이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문제 삼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끝판대장인 미국도 노동자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 사회와는 다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취소... 기자회견으로 대체 - 연합뉴스 아래 링크 클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885482

작가노조가 파업해서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취소됐다.
작가들의 권리를 위해서 영화배우들이 시상식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작가들이 없다면 배우들은 레드카펫을 밟을 권리가 없습니다."

슈렉2 의 에피소드.
마녀가 사는 큰 성에 왔는데 경비가 들여보내주지 않자 경비에게
"사실 우린 노조에서 나왔는데요" 라고 하자, 경비가 반색을 하며 들여보낸다.

한국은 빌딩의 경비조차 노동조합에서 왔다고 하면 불편하게 본다. 본인도 노동자이면서. 이게 한국 사회 노동계의 현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曰, "제가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 曰, "핀란드는 교원노조와 교장협의회 사이가 아주 좋다. 핀란드의 교장 대부분이 교원노조에 가입해 있고, 나 역시 그렇다."
영국도 교원노조와 교장노조가 따로 있다. 교장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한다는 것.

선진국에는 대부분 경찰노조가 있다. 소방노동조합도 있다. 심지어 군인노조까지 있다.
경찰, 소방관, 군인이 파업하면 치안과 국방은 어떻게 되냐고? 2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독일의 경우 미국에서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했지만, 군인노조(병력의 65%)가 '젊은이들의 목숨을 미국의 총알받이로 쓸 순 없다" 고 반대했고, 결국 파병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군인노조가 비리 사령관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군인노조가 활동하면 군대가 청렴하진다는 결론이 도출 가능하다.

프랑스에서는 검사, 판사 노조가 있다. 판사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 생각한다는 것.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화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대학 다녔다고, 대학원 다녔다고, 팀장 과장이라고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노동문제를 철저히 가르친다. 상기 내용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도 안 되는 것이다. 독일은 초등학교에서 1년에 6차례 모의단체교섭을 진행한다. 초딩들이 경영자, 노동자 간부가 되어보고 임금인상요구안 만들고 공부한다. 무슨 학교에서 데모하는 기술을 가르치네? 전체에게 유익하기 때문.

프랑스에서 고1이 되면 사회과목 시간에 1/3을 가르치는 것이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이다. 이러한 것을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편이 사회발전에 유익하다, 는 것.

수업 에피소드 하나.
노동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대학생들. '노동자 인터뷰 기사 작성하기'란 레포트를 받아들고 "아니 노동자를 어떻게 만나죠?" 란 고민을 한단다. 하종강 샘의 답은 간단하다. "여러분 가족 중에 있습니다. 가족 중에 찾아보세요." (청중들 웃음) 이 레포트를 통해 어머니께서 18년 동안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학생도 있었단다. 경찰서에 인터뷰를 나간 다른 학생은 "다른 선진국에는 대부분 경찰노동조합이 있다고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다 묻기도 전에 쫓겨났단다. (웃음)

북유럽 국가들은 모든 노동자의 70~80%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다. 우리나라는 10%가 가입해 있는데 이것은 OECD 30개국 중 29위. 한국 노동자들이 OECD 30개국 중 연간노동시간 1위, 인구10만명당 산재사망자수 1위 등을 기록한다.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정서는 한국노동운동이 너무 강해서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이트칼라 노조가 늘어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한국도 다른 나라보다 늦었지만 점점 늘어날 것이다.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은 앞으로 선택하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노동조합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는 대부분 모르고 산 것이다. 노동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 나의 가족 문제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노동문제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친근해 지시길 바란다.


끗.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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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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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는 왜 교회 어른들에게 교회에 헌신적이고 충성을 다하는 청년으로 비춰지는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내가 체제에 얼마나 비협조적이라는 것을. 수직적인 위계구조 속에서 남들 다 따라가는 일에다가 당당히, 자부심 비슷한 것을 섞어서 아니오를 외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것은 교회 리더십들로 하여금 나를 특이한 놈, 별종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한 애고 나쁘게 보면 조직에 하등 도움 안되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교회의 권위적인 수직문화에 나름대로의 소심한 반항을 펼치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장로님들은 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에 헌신하는 청년으로 보고 있을까. 첫째로 과거 찬양인도 및 회장 직분의 버프일 것이고, 둘째로 서서히 교회구조에 녹아들며 변해가는 성향 탓일 것이다. 내 본성(?)을 알면서 회유책의 일환으로 '헌신적인 강회장'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측도 해보지만 당연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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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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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날 우리를 불러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하나되어 찬양하고 기도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니 크신 주 앞에 순복합니다. 이 시간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의 크심과 나의 작음을 깨닫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런 약하고 작으며 미련한 우리를 주 백성 택해 삼으셔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모든 순간에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체험하길 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맘몬이라는 최고의 우상이 물질주의를 부추기며 경제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봅니다. 더욱 더 악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 할 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움을 선포하며 그 삶을 당당히 살아냄으로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작은 등불 비추는 삶을 살길 갈망합니다.

사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앞에 가족을 잃고 아직까지 신음하며 울부짖는 이들이 있습니다. 구하건데 나라의 정치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가여이 여기시는 이들의 눈물을 닦고 마음을 만져주며, 당파의 이익이 아닌 그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법을 제정하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우리 역시도 고통거부굶주림혹은 소중한 것들의 상실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로 우리의 손을 뻗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고통받는 약자의 편에 서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니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되게 하시고, 예배당을 나서며 다시 시작되는 우리의 삶의 예배에서도 삶의 한 자락이라도 그리스도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품고 날마다 순간순간 천국의 소망 누리길 소망합니다.

이 모든 고백, 형자자매의 마음을 모아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우리 예수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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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라기보단 설교에 가까웠던 나의 대표기도.교만 며칠동안 기도문을 구상하며 설교적 기도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디 사람이 쉽게 바뀌나. 하고싶은, 그리고 해야하는 기도를 써내려가다보니 결국엔 설교형으로 하고 말았다. 뭐 딱히 피드백 받은 건 없다. 다음 대표기도 땐 고백형으로 준비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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